프로그램
교회뉴스
글 내용 보기 폼
제목 생생 교구속으로-'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회심'의 의미에 대해서'

남하린 | 2022/01/25 20:01

'생생, 교구속으로'에서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맞아 '바오로 사도의 회심'의 의미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김영남 신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신약성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다리본당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바오로 신학 전공)의 모습이다.
프로그램명: ‘향기로운 오후, 주님과 함께
방송시간: 0125(), 오후 204222
방송제작: 조미영 PD, 진행: 남하린 아나운서
주제: ‘생생, 교구속으로-'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회심'의 의미에 대해서'
 
진행자: 저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기념해서, 바오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회심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바오로 신학 전문가이신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님을 만나러 학다리성당에 나와 있습니다. 그럼 김영남 신부님을 만나보겠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김영남 신부: 안녕하세요, 학다리성당에서 사목하고 있는 김영남 가브리엘 신붑니다.
 
진행자: , 신부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맞이해서 성 바오로 회심의 의미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찾아왔는데요. 먼저, 재작년에 로마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는데요. 어떤 전공을 하셨나요?
 
김영남 신부: 네, 저는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일명 비불리쿰(Biblicum)이라고 불리는 학교에서 2020년 11월 논문 발표를 했고, 신약성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보통 성서학이라고 하면, 낯설어 해요. 그래서 성서학이 뭔지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보통 흔하게는 성서신학을 많이 알고 계시는데, 성서학과 성서신학은 구분이 돼요. 성서신학은... 보통 신학... 하면,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학문을 얘기하잖아요. 그 신학 안에 여러 분과가 있습니다. 가령, 교회신학, 전례신학, 윤리신학. 그 중에 하나가 성서신학이 되죠. 성경을 바탕으로 해서 하느님을 알아가는 그런 학문을 성서신학이라고 얘기하죠. 성경을 접하는데, 신학을 초점으로 해서 성경을 공부하는 그런 학문이죠. 반면에 성서학은, 똑같이 하느님을 연구합니다. 성서학도 성경을 대상으로 공부를 하니까요. 그런데 차이점이 있다면, 성서학은 신학의 한 부분으로써, 성경을 대하는 게 아니라, 독립적인 한 학문으로써 성경을 대합니다. 그래서 일반 인문과학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게 되죠. 그래서 로마 교황청에서 1909년에, 이러한 흐름, 성서학의 흐름을 따라서 1909년에 바티칸에서 교황청립 성서대학을 세우게 되죠. 성경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요. 그래서 저는 이 학교에 다녔고, 논문 발표 후에 성서학이라는 학위를 받았습니다. 또 특별히 성서학 가운데서도 바오로 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신약성서학의 전공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행자: 네 그렇군요. 신부님, 신부님은 바오로 신학을 전공하셨는데요, 그 이유는요?
 
김영남 신부: 네, 처음부터 바오로 신학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신약성경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유학을 갔었던 것이고, 조금씩 공부를 하다 보니까, 바오로 신학을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고요.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나는 것이, 유럽에서 공부하다 보면, 1년에 한 번씩 유럽에서 같이 공부하는 교구 신부들 모임이 있어요. 그때 당시에, 최종훈 신부님이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임근배 신부님이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제가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한번 모여서, 생활 나눔 하다가, 서로 공부하는 것에 대해 나누게 됐어요. 그러면서 최종훈 신부님은, 공관 복음서를 공부한다고 그러시고, 임근배 신부는 요한계 문헌, 이렇게 두 명이 다 정하다 보니깐, 자연스럽게 (나도)바오로 신학을 전공하면, 나중에 교구로 돌아가서 봉사할 때, 분과를 나눠서 하는 것이니까, 좋겠다 싶어서 막연하게 바오로 신학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 와중에,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까, 괜찮은 교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젊은 신부님이시고, 예수회 신부님... 그래서 꾸준히 오랫동안 박사 공부까지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으로 그 신부님께 석사 논문을 쓰고, 박사 논문까지 쓰게 됐었던 거죠.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뭐냐면, 제 사제 서품 성구가 갈라티아서 2장 20절이에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입니다.” 사실 그 구절에 대해서 서품 때부터, 신학생 때부터 좀 더 깊게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에 깊은 갈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다 보니까 ‘바오로 신학을 공부하자.’ 이렇게 결정적으로 그 동기가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진행자: , 서품 성구 때문에 바오로 신학을 전공하게까지 됐는데요. 사도 바오로는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영남 신부: 네, 일단 먼저 드는 생각이 바티칸 대성전을 가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바티칸을 가다 보면, 바티칸 성전 앞에 큰 조각상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성 베드로, 하나는 성 바오로. 아주 묵직하게 큰, 커다란 상으로 조각이 되어있는데, 마치 교회 두 기둥인 양, 그렇게 서 있는 그 모습, 사실 제가 처음으로 바오로 사도를 느낀 게, 교회 기둥으로 느꼈던 것이죠. 교회 조각상을 바라보면, 바오로가 칼을 들고 있어요. 칼이라는 것이... 도상학에서 칼은 이 바오로를 표현할 때, 순교도 얘기를 하지만, 사실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의 영향력, 능력, 생명력을 표현하는 게 칼입니다. 사실 바오로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었죠. 세 번에 걸쳐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려 주고, 또 믿게끔 만들었던 인물이, 바로 바오로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바오로가 쓴 편지를 보면, 여러 가지 신학적인 개념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의로움, 자유, 화해... 이런 개념들이, 후에 그리스도교가 사상적으로 발전하는 데에 토대가 되었던 개념들이에요. 그렇게 보면, 바오로는 교회 기둥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게 첫 번째 생각이고, 또 하나 (생각이)들었던 것은, 제가 공부하면서 바오로 서간을 계속 몇 번이고 읽고, 연구하다 보니까, ‘아, 이양반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행자: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끼셨나요?
 
김영남 신부: 일명, 엄친아라고 그러죠? 능력이 너무 많아요.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 글을 쓴다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게 아니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종이도 없었고... 그래서 파피루스나 양피지 같은 데 글을 쓰잖아요. 글 쓰는 것 자체도, 특별하게 교육을 받았던 사람인 것이죠. 편지를 쓰는 것 자체가 특별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고, 게다가 바오로는... 편지를 읽다 보니까, 유다교의 율법에 관한 이해,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아주 깊어요. 성경을 인용하는 모습, 성경을 풀이하는 모습, 게다가 그때 당시, 바오로 시대 당시에는, 수사학이 아주 중요한 과목이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는 사람을 설득시키기 위한 과목이었죠. 그래서 학생들은 그걸 다 배웠던 거예요. 근데 바오로 서간을 읽다 보면, 수사학적인 요소들이, 수사학적인 기법들이 아주 많이 발견이 돼요. 그걸 보면서 ‘이야...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머리가 똑똑하면서 열정적으로 또 복음을 전파하는... 그럼으로써 이 후에 믿는 사람들이 바오로의 편지, 서간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알게 되고, 또 믿음을 깊게 했던 그야말로 신앙의... 우리 교회의 큰 기둥이자 또 현재까지도 우리를 신앙으로 이끌어주는 그러한 인물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겠죠.
 
진행자: 신부님, 지금 주보에 바오로에 대한 글을 게재하고 계신데요. 신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나요?
 
김영남 신부: 네, 무엇보다도 갈라티아서를 썼던 것은... 제가 논문을 썼기 때문에 그나마 많이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일단 그 갈라티아서부터 시작을 했던 것이고요. 갈라티아서를 써서 풀이해 나가면서 제가 신자 분들에게 나누고자 했던 가장 큰 메시지는 이겁니다. 갈라티아서가 2000년 전에 예수님 후에 바오로 시대 때, 갈라티아 공동체에게 쓰인 것이긴 하지만, 2000년 전에 쓰인 편지이지만, 사실 그 편지가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사실 갈라티아서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할례와 율법에 관한 문제거든요. 그런데 우리와 동떨어져 보이잖아요. 우리와 관련 없는... 그런데 바오로는 사실 할례와 율법 그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기 보다는 할례와 율법을 대하는 갈라티아인들의 생각, 그리고 그 모습을 지적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라티아인들의 그런 모습을 바라볼 때, 사실 우리도 여러 가지로, 우리 신앙생활에 성찰해볼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우리가 주일 미사나, 고해 성사, 판공 성사를 보잖아요. 그것도 하나의 규정이잖아요. 그런데 규정 안에서 그렇게 지켜야 된다는 것. 그게 규정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더욱 잘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바오로는 그 외적 규정에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게 바로 갈라티아서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거든요. 갈라티아인들이 할례,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건데, 그것은 뭔가 외적인 규정을 의지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어가려고 하는 노력이거든요. 그런데 바오로는 그러한 갈라티아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알맹이가 빠진, 하느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빠진 그냥 외적으로 뭔가 규정을 지켜감으로써, 자신들이 하느님 앞에서 뭔가 의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바오로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인 규정에 따라 살지 말고,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예수님과의 관계, 그런 하느님에 대한 믿음, 믿음의 순수성을 찾기를 바오로는 원했던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러 의미를 주는 것 같아요. 신앙이 자칫 (잘못)흘러가다 보면, 뭔가 해야 하는 것들, 그리고 거기에 따라가야 하는 것들, 그러다보면, 우리 마음이 같이 못 따라가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같이 따라가게끔... 오히려 마음이 먼저 가서, 행동이 따라오게끔... 그렇게 했던 인물이 바오로였던 것이죠.
 
진행자: 신부님, 25일은 성 바오로의 사도의 회심 축일인데요. 회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나요?
 
김영남 신부: 네, 회심을 이야기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바오로가 했던 환시 체험을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세 번에 걸쳐서 바오로의 환시 체험을 언급하고 있거든요. 보통 기원 후 32년~36년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바오로가 예루살렘 대사제로부터 하나의 명령을 받죠. 다마스쿠스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결박해서 압송하라는 임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떠나게 되죠. 그런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죠.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왔을 때, 정오 무렵에 갑자기, 큰 빛이 일어나더니 그 빛 때문에 바오로는 눈이 멀게 되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러자 그 소리에 놀라서 바오로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나서, 바오로는 예수님의 지시대로 다마스쿠스에 가서, 하나니아스라는 인물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럼으로써, 그 전에 박해를 했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바오로가 그리스도인들의 선봉자가 되는 것이죠. 믿음의 선봉자가 돼서, 믿음을 선포하는 이가 되었던 것이죠. 계속 박해하는 인물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이. 180도 바뀌게 된 거죠. 회심의 의미가 그렇게 전향된 삶,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진행자: , 그렇군요. 예전에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이라고도 부른 것 같은데, ‘회심개종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떤 표현이 더 맞나요?
 
김영남 신부: 네, 사실은 교회에서 얼마 전까지, ‘바오로 회심 축일’을 ‘바오로 개종 축일’로 그렇게 불러오곤 했습니다. 사실 그 예가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바오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개종’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개종’이라는 것은 어느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겨가는 것을 얘기하잖아요. 그렇게 보자면,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옮겨가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그리스도교에 입교하기 위해서 유다교를 버린 것일까....? 사실 그렇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바오로는 편지에서 율법을 많이 인용을 하고 있거든요. 그 말은, 예수그리스도를,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하느님의 진정한 뜻, 의도, 구원 계획을 제대로 이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오로는 유다교를 버린 게 아니라, 유다교 안에 있었지만, 진정한 빛을,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이에요. 그런 부분에서 사실 바오로는 유다교냐, 그리스도교냐 구분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후대 사람들이 유다교, 그리스도교 구분을 해서 개종이라고 붙였던 것이지, 사실 바오로에게는 그런 이분법적인 구분이 없었다는 사실. 그런 의미에서, ‘회심’이 더 맞죠. ‘회심’은 사람의 변화를 얘기하잖아요. 그렇게 박해를 하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이가 180도 바뀌어서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런 사람이 됐기 때문에,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고, 또 그것이 행동으로써 뭔가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이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사실 ‘회심’이라는 의미가 맞죠. 전인적인 의미에서의 회심.
 
진행자: 바오로는 성장 과정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나요?
 
김영남 신부: 바오로 서간에서는 사실, 정확하게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사도행전에서 언급을 해요. 사도행전 22장 3절에 보면,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또 가말리엘 문화에서 조상 전례에 관한 엄격한 율법을 따라 교육을 받았다고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이 가말리엘은 유다교 문헌에 보면, 1세기 중반 예루살렘 최고회의 구성원 중에 한 명이었던 가말리엘 1세로 추정이 됩니다. 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바오로가 타르수스 지역 출신이라고 언급이 되어있어요. 타르수스라는 지역은 유다인들도 많이 살았던 지역이지만, 그리스 로마가, 헬레니즘 문화가 꽃피웠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유다교를 잘 배우고, 또 교육도 잘 받았던 것이기도 하지만, 자연스럽게 헬레니즘 문화에도 익숙해지기도 했던 것이죠. 그러면서 그리스 로마 문화를 많이 배웠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추정해 볼 수 있죠.
 
진행자: , 그렇군요. 신부님, 신약성경 안에서 바오로가 쓴 편지가 13권이라고 들었는데, 이 바오로의 서간에서는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요?
 
김영남 신부: 네, 바오로 서간이라고 붙여진 것은, 바오로가 직접적으로 썼거나, 바오로 제자들이, 바오로의 이름을 빌려 썼던 편지라고 해서 바오로 서간이라고... 통칭으로 13권의 편지를 이야기하는데요. 특별히 이번에 우리가 ‘바오로 회심 축일’을 맞이해서 그 부분과 관련해서 서간에서 어떻게 바오로가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바오로가 편지를 쓸 때, 편지 쓰는 방식에 관한 것이에요. 바오로가 회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회심을 하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바오로가 편지를 쓸 때, 그때 당시, 가장 좋은 편지는, 대화하는 것처럼 써야 한다고 규정이 되어 있어요. 마찬가지로 바오로도 편지를 쓸 때, 그냥 일방적으로 정보 전달, 본인이 회심했다고 정보 전달할 차원에서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그런 회심을 이야기 하면서, 특별하게 편지를 받는 편지 수신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생각해보고, 고민해볼 수 있도록, 초대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회심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마치 대화처럼요. 그런 의미에서 바오로 편지가 갖고 있는 메시지, 또 그것을 받는 갈라티아인들이 편지를 받았을 때, 또 로마인들이 바오로 서간, 각 공동체가 받았던 편지를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의미들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죠.
 
진행자: 회심 사건을 기준으로 그 전의 삶과 그 후의 삶은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김영남 신부: 가장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필립비서 3장 8절이거든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 외에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고 해요. 그러면 그 쓰레기가 뭔가... 바오로가 쓰레기라고 얘기하면서 연상하고 있었던 것을 무엇일까? 바로 필립비서 3장 3절부터 6절, 사실 그 앞에서 이야기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본인이 이스라엘 민족 출신이라는 것. 베냐민지파 출신,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사이였다는 것. 그리고 율법에 따라서 아주 흠 없이 살았다는 것. 인간적으로 많은 노력에 의해서 살았다는 것. 인간적인 측면들... 많이 이야기하고 있죠. 그런데 바오로는 이것을 모두 쓰레기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오로가 편지를 쓰면서 율법을 인용하고, 또 본인의 삶에 대해서도 과거의 삶에 대해서도 흠 없었다고 얘기를 하고, 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사실 전적으로 쓰레기라는 것이,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어떤 의미냐 하면... 예수님에 비하면 가치가 없다...라는 얘기에요. 그걸 표현하는 의미가 쓰레기라고...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가치 순위를 어떻게 두느냐... 그런 차원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이 먼저 중심이 되었을 때, 다른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적인 노력, 출신, 신원, 인간적인 어떤 능력,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사실 그런 부분들은 오늘날 우리 신앙인에게도 참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행자: 쓰레기라는 표현이 굉장히 강하게 느껴지는데요... 바오로가 그런 표현을 쓴 것은 바오로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을까요?
 
김영남 신부: 네, 그렇죠. 바오로는 첫 번째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열성적인, 보통 바오로를 아주 열성적인 성격으로 묘사를 많이 하잖아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주 강하게 표현했던 인물이죠. 그래서 쓰레기라는 표현... 그렇게 사용을 하고 있는 것이죠.
 
진행자: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맞아 신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김영남 신부: 네, 바오로가 쓴 서간에서 여러 표현이 있겠지만, 많이 나오는 표현 중에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에요. 세보니까 120번 정도, 그렇게 많이 쓰인 표현입니다. 바오로가 여러 서간을 썼는데, 그 서간들이 각 공동체가 갖고 있는 문제점, 여러 가지 문제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것인데, 공통적으로 자주 쓰는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거든요. 이 표현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두 가지가 있어요. 바오로는 이 표현을 가지고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첫 번째는 신앙인의 삶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그런 차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가르침과, 보여주신 모습, 그런 것들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 예수님의 삶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그런 차원이 있는 것이죠.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우리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그 짤막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에서 드러내고 있거든요. 어떤 의미냐면... 바오로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나와 그리스도가 친밀한 일치관계를 맺고 있다는 표현이죠.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잖아요. 그러니까 바오로가 예수님과 일치를 한다면 바오로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얘기잖아요. 더 나아가 바오로가 어떤 표현을 하냐면요.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유다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 말은, 본인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처럼, 본인뿐만 아니라 형제, 이웃,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것이죠.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이거든요. 결국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웃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표현이거든요. 성 바오로 회심 축일을 맞아서 바오로가 여러 공동체에 공통적으로 많이 사용했던 표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표현을 우리 신자 분들도 잊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00년 전에 바오로가 여러 공동체에 해 줬던 말. 그 말은 결국 우리를 위한 표현이기도 한 것이겠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 신앙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 또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 모두가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 안에 담겨 있다는 것. 그렇게 할 때, 우리 신앙은 좀 더 성숙해질 것 같습니다.
 
진행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씀 해 주셨는데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 그리고 함께 가야 한다는 말씀, 우리 신자 분들이 꼭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신부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영남 신부: 네, 고맙습니다.
 
진행자: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맞이해서 성 바오로 신학 전문가이신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님을 만나봤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에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에 관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학다리성당에서 전해드렸습니다.

 
<저작권자(c)광주가톨릭평화방송,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작성일 : 2022-01-25 20:00:12     최종수정일 : 2022-01-25 20:01:19

목록
이전글
다음글
 

Top이동